2014년 갑오년을 맞아 르완다에서 새 해 인사를 올립니다.
올 해 어떤 일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작년 한 해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를 보듯 눈 앞을 지나갑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구나 뒤늦게 감사하는 일들도 많은데 또 한 편 하나님이 끝까지 함께 하시겠지 하는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지켜보는 일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듯 늘 저희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인간적으로 저는 갚을 길 없지만 하나님이 친히 보셨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라 믿습니다.
1. 훈희 대학 진학
제 옆 방에는 감기 몸살이 걸린 훈희의 콜록 콜록 기침소리가 심합니다. 미국 대학 몇 군데 지원을 하고 필요한 서류와 Essay들을 써 보내느라 마감에 몰려 무리했나 봅니다. 지난 한 한기 내내 SAT 시험 준비하느라 고생 했고, 결과가 어떻든 그 과정에서 많이 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기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시험칠 때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자기도 겸연쩍어 하며 이야기하더군요. 한국에서의 고 3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여기에서 긴장하고 노심초사합니다.
어짜피 학비를 보태어 줄 수 있는 부모도 아닌지라 본인도 기대하지 않고 무조건 장학금을 탈 수 있는 학교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자식들의 대학을 걱정하려 했다면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지만 막상 자식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후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인생의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붙들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저에게도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겠지요. 그리고, 2년 후에는 둘째 진희 또 그 2년 후에는 강희가 곧 이 과정에 직면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좋은 대학에 붙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네요. 붙어서 좋은 것은 본인이 아니겠습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공연한 웃음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이 모든 과정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이 드러나야 영광이 되는 것이겠지요. 훈희가 대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과와 관계없이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혹시 대학을 허락하시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는 것을 간증할 줄 아는 훈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부지 구입
2013년 르완다에서의 중요한 진전 하나를 꼽으라면 2.5 헥타르(만 평)의 땅을 구입했다는 것입니다. 후원 교회 중 하나인 라이브 교회 성도님들이 오랫동안 모아오신 귀한 헌금을 르완다 선교에 써 달라고 만장일치로 결정하셔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가격에는 살 수 없는 좋은 땅 만평을 구했습니다.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 The country of thousands hills) 라는 별명에 맞게 평평한 땅을 구하기 힘든데 땅 전체가 경사가 거의 없는 평평한 땅입니다. 인근에 공항과 군 병원이 있고 옆으로 신공항부지로 가는 큰 도로를 뚫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제 평생 처음으로 경매에 나섰습니다. 몇 번 우여곡절이 있어 유찰이 되었고,브로커들이 끼어들어 마음 고생 엄청 했습니다만 그래도 지나보니 스릴도 있고 재미있었습니다. 땅의 원주인은 1994년 Genocide 때 정부군의 대령으로 학살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전쟁 후 프랑스로 도망갔는데 생사여부가 확실치 않습니다. 르완다 정부에서는 전범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학살의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멈춘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가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피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고 가해자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처분하는 과정이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당일 경매를 지켜보러 왔던 피해자 유가족 중 한 명이 경매가 모두 끝난 후 저에게 좋은 값에 땅을 사 주어서고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면서도 이렇게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너무나 오래 걸렸다고 한숨을 쉬더군요.
처음에는 어쩐지 원한이 생길 땅 같아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94년 내전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에게 얼마라도 보상액이 돌아가고 또 그 땅에 르완다의 미래의 인재들을 기를 수 있는 학교가 세워질 수 있다면 오히려 1석2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경매에 들어갔습니다. 르완다 돈으로 9천만 프랑 (약 13만 5천불) 딱 헌금하신 액수와 일치하여 3차에 걸쳐 진행되었던 경매에서 낙찰을 받았습니다.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고 보니 조금 서운하긴 한데 그게 하나님의 방법인가 봅니다.
이 일도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땅 값을 일시불로 다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등록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땅을 처분한 기관이 따로 있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는 곳이 따로 있고 또 돈이 정확히 지급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기관이 또 따로 있고 하는 식으로 부처에서 부처로 책임자에게서 책임자로 서류들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최종 확인서가 나와서 그걸 토지 등기소에 가져가면 바로 된다고 저를 위로하기는 합니다만 그 동안 몇 번의 경험으로 토지 등기소도 만만치 않게 시간을 끕니다. 아프리카에 오래 살아서 세월에 대해 무감각해지지 않았더라면 다혈질인 제가 이 곳 공무원들 몇 명의 멱살을 잡았을 것 같습니다.
3. 주사랑 한인교회
2010년 7월 첫째주 세워진 르완다 한인교회가 2년 6개월이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에게특별한 의미가 있었다면 저희가 집을 열어 예배당으로 내놓았고 매주 모이는 한국사람들에게 한 끼의 점심을 제공하는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겠죠. 물론 저희 가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교회를 섬기는 분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구요. 처음에는 20명 남짓 모여서 예배드리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70-80명 정도 꾸준히 모이는 교회입니다. 코이카 봉사단원들이 많고 이 곳에 진출한 KT 직원 가족, NGO에 근무하는 청년들이 대부분입니다. 20대와 30대가 60% 정도 되는 청년부 같은 분위기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매년 연말 실시하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을 알겠습니다. 르완다에 오기 전에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는 사람이 교인의 30% 정도 됩니다. 종교가 없었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불교와 천주교인들도 있습니다. 가끔 한국에 돌아간 청년들 중에 한국에서도 계속 교회를 나가고 싶은데 좋은 교회를 소개시켜 달라는 연락을 해 올 때 가슴 뿌듯합니다. 이렇게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꾸준히 생겨납니다.
처음 교회를 세우질 무렵 꼭 한인교회가 필요한 이유가 뭐냐고 제게 묻는 분이 있어서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세워질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왜 세우지 말아야 하냐’ 고 되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인교회를 세우는 일이 선교에 해당하느냐 아니냐는 논의는 복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질문입니다.
2년반 꾸준히 노력해서 교회 등록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르완다 법에 의해 교회는 등록을 위해서 반드시 부동산을 취득하게 되어 있어서 부지도 1에이커 마련했습니다. 전임 사역자를 모시기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사례비도 없고 초교파이기를 요구하는 어려운 조건에도 흔쾌히 뜻을 같이 하시겠다는 목사님이 있었고 일차 이 곳을 다녀가셔서 내일 주일날 이 곳 한인교회는 총회를 열어 최종 결정을 합니다.
2013년에 이어 올 해 다시 제가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되었는데 교회의 완전한 등록과 담임목사님의 정착을 돕는 것이 2014년 주사랑한인교회를 섬기는 저의 목표입니다.
표면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르완다는 학살에 가담한 교회(주로 카톨릭)에대한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재정이 취약한 개척교회로 하여금 먼저 부동산을 취득하도록 요구하고 각 단계의 지역 관청에서 승인서를 받도록 하는 등 까다롭고 철저히 통제하려 합니다.
4.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지난 2년 동안 열심히 2&5 유치원을 세우는데 공이 많았던 오유진 선교사가 귀국했습니다. 공부도 좀 더 하고 싶어하고 또 장기 선교사로 전환하기 위해 결혼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어서 훗날을 기약하고 떠났습니다. 올 해도 이희주 선교사는 저희 가족과 함께 살면서 유치원과 새롭게 시작하는 초등학교까지 각종 행정을 맡아 볼 겁니다. 성실 그 자체인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 8일에는 고향인 대봉교회에서 후배 박준범 백지연 의료선교사 가족이 이 곳에 도착합니다. 부부가 내과 소아과 개업의였던 이 젊은 집사 부부는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르완다로 오고 싶다고 작년에 연락을 해 왔습니다. 재작년 한 차례 단기 선교를 다녀갔을 뿐이고 선후배의 인연이야 있지만 더 좋은 여건의 한국이 있고 더 좋은 여건의 다른 선교지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한 가운데 오지 나라에 오겠다고 했을 때 이 모든 일은 사람이 계획하고 이루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구 천백만명에 의사 600명이 남짓한 나라입니다.
오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받겠다고 대답하고도 막막했습니다. 의료면허를 받는 일이 아프리카라고 해서 쉽지 않은 것을 그 동안 수 차례 보았고 더구나 르완다에서 의료분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제가 어떻게 성사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 와중에 Free Methodist 교단 총회장과 총무 목사님과 함께 내년 8월에 오픈하는 청소년 문화 센터 건립 건으로 회의를 하던 중 자신들간의 대화 속에 Kibogora 병원이라는 단어가 제 귀에 들렸습니다. 그 병원 이름은 저에게 거의 잊혀진 것이었지만 그 순간 확 귓전을 울렸습니다. 그 병원을 어떻게 아냐고 하니까 그 두 분 르완다 목사님들은 웃으면서 자신들은 그 병원을 세운 미국 선교사님들에 의해 길러진 세대이며 미국 선교사 자녀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중 한 명이 Bob Snyder 라고 제가 FHI-Uganda 디렉터를 맡고 있을 때 FHI-Kenya 디렉터를 맡고 있던 제 옛 동료였습니다. 세상이 참 좁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만들어 가시는구나. 예전에 Bob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 Al Snyder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르완다 시골에서 오랫동안 봉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Kibogora 라는 병원 이름이 흘려가듯 들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런 사정을 다 이야기하면서 제가 한국에서 르완다로 오려고 하는 의료선교사 가족이 있는데 그 병원에서 근무하게 해 주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습니다. 병원은 현재 의사가 부족해 애를 먹고 있는데 한꺼번에 내과 소아과 전문의가 온다고 하니 대환영을 했구요. 요즘은 제가 뭘하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뭘 하시는지가 훨씬 더 궁금합니다. 제가 하면 뭘 얼마나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고 뭘 믿고 저한테 시키시는 일 있으면 그거나 열심히 하면 되는거죠.
5. JOY center (청소년 문화센터) 및 교육재단 설립
이 곳을 방문하셨던 재미교포 김흥수 목사님께서 사모님과 함께 내년 르완다에 계시는 동안 르완다 청소년들을 위해 운동과 문화활동을 통해 복음을 전하시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이 곳 Free Methodist 교단과 함께 센터 건립을 위해 진행 중입니다. 이제 건축을 시작해서 오는 4월까지 완공을 할 계획입니다.
르완다에서 선교의 가닥을 잡으려 할 때 이렇게 다가온 것이 청소년 및 교육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확보한 땅에 학교와 청소년 센터 등을 생각할 때 교육재단을 세워 르완다의 다음 세대를 위해 교육의 장이 마련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르시는 방향이라는 마음이 생겨 준비 중입니다. 이송희 선교사의 무대뽀 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르완다에‘유치원부터 르완다 최초의 여대까지’라는 하나님의 일꾼들을 키워내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더 많은 분들이 박준범 백지연 집사처럼 헌신할 수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위해 좀 더 자신을 내려놓고 좀 더 과감하게 미래를 향해 부딪쳐 보는 한 해가 되시기를 또한 기원합니다.
2014년 1월 4일
르완다에서 이상훈, 이송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