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
―호세아 2장 14~15절
하느님은 사람의 영혼을 이끌어
사막으로, 광야로, 신성한 독거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은 하느님이 순수한 하나가 되시는 곳이며,
자기 안에서 분출하시는 곳입니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빨리빨리”라는 구호에 떠밀려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를
하느님은 종종 빈들로 꾀어내신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를
빈들로 내 모실 때가 있는 것이다.
빈들, 그곳은 분명 광야를 가리킨다.
광야는 돈도, 이웃도, 명예도,
권세도 맥을 추지 못하고,
하느님만이 지지를 받고,
하느님의 거룩한 바람만이 채우는 자리다.
광야는 인간의 절망이 도사린 곳이지만,
하느님이 여시는 희망의 문턱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우리를 인간의 절망이 도사린 빈들로 꾀어내신다.
이렇게 빈들로 꾀어내시는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냥 이야기 한 토막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냥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다.
일단 사냥감이 나타나면,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사냥감을 추격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을 뒤쫓다가 이상하게도
추격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기다린다.
인디언들과 함께 사냥에 동행하던 백인이 물었다.
“한참 사냥감을 뒤쫓더니, 왜 갑자기 멈추어 섰습니까?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기에 뒤를 돌아보는 겁니까?”
인디언이 대답했다.
“나는 지금 나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저기 뒤에 내 영혼이 나를 따라오고 있는데,
내가 너무 빨리 달리다보면,
내 영혼이 나를 찾지 못할 수도 있기에,
이렇게 멈추어 서서 내 영혼을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우상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다보면,
자연히 정신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
숨 가쁜 달음박질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자기의 영혼을 기다리던 인디언의 모습은,
지금까지 정신없이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다가
빈들로 내몰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퍼포먼스로 펼쳐 보이는 예언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정신없이 바쁜 것을 황망하다고 한다.
황망(慌忙). 다급할 慌에 바쁠 忙이 결합된 말이다.
이 두 글자 모두 마음 心을 부수로 하고 있다.
다급할 慌은 마음 心과 거칠 荒이 결합되어
“마음이 거칠어진 상태”를 가리키고,
바쁠 忙은 마음 心과 망가질 亡이 결합되어
“마음이 망가진 상태”를 가리킨다.
황망이라는 글자에서 볼 수 있듯이,
물질의 축적과 외적 성공이라는 우상을 향해
숨 막힐 정도로 바삐 달려가는 삶은
우리의 마음을 온통 폐허로 만들고 망가뜨린다.
이렇게 폐허가 된 마음자리에는
한 포기의 풀,
한 송이 들꽃,
단 한 명의 사람도 둥지를 틀지 못한다.
심지어 하느님마저 보금자리를 거두어들이시고 만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방에 혼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블레이즈 파스칼의 말이다.
차분하게 하느님 앞으로 물러나 앉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를 이루어 보겠다고
황망히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는 데에서
인간의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는 뜻이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빈들로 꾀어내신다.
숨 가쁜 경주를 멈추고, 거칠어진 마음을 추스르고,
망가진 마음을 회복하게 하기 위해서다.
느림의 여유를 가지고, 숨 좀 돌리며,
어딘가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를 정신을 차리고,
더디게 따라오는 영혼을 되찾게 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이 꾀어내시는 빈들은
우리가 바람을 쐴 수 있는 자리다.
그곳에서 거룩한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빈들은 분주한 현업의 자리,
경쟁과 각축으로 뒤얽힌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 숨을 돌리는 자리다.
그곳에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이 머물기 때문이다.
빈들은 은퇴의 재미가 쏠쏠한 자리다.
그곳에서 하느님이 사랑을 속삭이시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은 빈들에 들어선 감흥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늦가을 바람에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빈들입니다
희망이 없는 빈들입니다
사람이 없는 빈들입니다
내일이 없는 빈들입니다
아니, 그런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은""
-고진하 님의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에서
마른 수숫대만 서걱이는 황량한 빈들,
희망도 없고, 사람도 찾지 않으며,
내일마저 기약할 수 없는 빈들로 나갔을 때,
시인의 눈에는 빈들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이 보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빈들로 물러나
그곳을 가득 채우고 계신
하느님 앞에 앉는 것은 더없이 귀한 일이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는 빈들로 물러나는
은퇴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은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바쁜 일손을 접고
물러서는 시간을 날마다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퇴수회(退修会)라는 말을 좋아한다.
물러나 마음을 닦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은퇴는 광야 생활,
하느님 앞에 차분하게 앉는 삶이다.
그저 고요하게 다가오시는 님을 바라보고,
은밀하게 내미시는 님의 손길을 붙잡고,
세미하게 들려오는 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다.
이렇게 물러나 고요하게 하느님 앞에 앉을 때,
그곳에서 거룩한 바람이 인다.
이 거룩한 바람을 일컬어 성령이라고 한다.
우리가 빈들로 물러나 하느님 앞에 앉을 때,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룩한 바람이
우리네 막힌 숨통을 틔워주고,
숨 가쁘던 우리네 삶의 숨구멍을 활짝 열어줄 것이다.
주 안에서 행복하세요(주주대봉/클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