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의 꿈
-한 구도자의 순례기-
배정웅 목사 (Spiritual Director, 뉴욕 아가페 크리스찬 치유 센터 대표)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가끔 도토리를 따러 산에 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토리는 여러 모로 당시의 내겐 중요한 수집품이었다. 마땅한 장난감이 없었던 그 시대에는 구슬이나 딱지 대용으로 훌륭한 장난감이었고 무엇보다 양식이 부족한 그 시대에 구수한 도토리 묵을 맛볼 수 있는 멋진 간식거리였다. 해서, 토실 토실한 도토리를 줍거나 따는 재미에 밥도 못 먹어가며 하루 종일 밀가루 부대자루 가득히 담아가지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 하게 휘파람까지 불며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집 앞에 떨어져 있는 그 흔한 도토리를 보는 나의 눈은 심상치가 않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아까운 생각이 들어 한 알을 집어 들어 보기도 한다. 이처럼 도토리 한 알은 내게 어린 시절의 추억 그 자체였다. 가난과 궁핍 속에 살아야 했던 나의 힘들었던 지난날을 대변하고 나의 과거의 모습을 회상시켜 주는 내 인생의 필름과도 같은 그 한 알인 것이다.
그 이후 어느덧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집 앞의 도토리를 보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집어 들고 싶은 충동을 여전히 느낀다. 그러나 지금 내겐 그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 있다. 그것은 내 생각과 의식의 변화이다. 요즘은 도토리를 볼 때마다 눈을 들어 그 도토리를 떨어뜨린 참나무를 바라본다. 이 작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저렇게 아름답고 거대한 나무를 이루었단 말인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이 한 알 속에 저렇게 큰 생명의 가능성이 감춰져 있음을 생각할 때 마다 습관적으로 막 집어 든 그 한 알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도 이 도토리와 같지 않은가! 우리 속에는 성장을 향한 강한 열망이 들끓고 있다. 그 누구도 거부하거나 막을 수 없는 용암과 같이 강력한 열망이 우리의 하루 하루의 삶 속에 억눌려 있다. 이 갈증, 이 염원, 이 욕구는 모든 인류의 공통된 꿈이요 최우선적인 바램이다. 마치 거대한 참나무의 가능성과 생명력이 이 작은 한 알의 도토리 속에 농축되어 있듯이… 그렇다. 도토리에게는 분명 꿈이 있다. 그 한 알로 사라져 버리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작은 한 알 한 알 속에 엄청난 생명의 신비가 내재되어 있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마땅이 되어야 할 그 눈 높이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 즉 완성된 인생의 멋진 집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집을 지을 수 있는 원자재로써의 가능성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가능성인 원자재를 가지고 설계도를 만들고 벽돌을 쌓고 한 칸 한 칸 방을 만들어 인생의 집을 건축하고 완성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처럼 우리가 결국 이루어야 할 가장 멋진 우리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곧 우리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까지는 그 누구도 도토리의 답답함을 벗어날 길이 없다. 거대하고 우람한 참나무로 자라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인생의 감옥 속에서 불만과 불평과 불안과 공포 속에서 쪼그리고 살 수 밖에 없다. 이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서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를 완성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의 인생에 비로서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에게 엄청난 가능성과 생명력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세상에서 자기실현이나 자기를 발견하여 참나무로 성장해나간 사람들이 흔하지 않다는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참나무를 원하면서도 이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방향일진대 그 반대로 도토리 속에서 답답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고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다 마감하고 마는가?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성경을 통해 심리적인 현상을 가장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는 프릿츠 쿵켈(Fritz Kunkel)이란 독일계 심리학자에 의하면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는 원수는 다름아닌 자기중심성 (egocentricity)이란 이름의 방해자요 대적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를 포함하여 인간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마치 우리 조상이 에덴 동산에서부터 경험하게 된 원죄와도 같다. 쿵켈에 의하면 사람의 정신적 영적 세계에 두개의 자기가 있다. 첫번째를 그는 자아(ego)라고 불렀다. 자아는 현재의 나를 형성하고 지켜가는 대단히 중요한 나의 모습이다.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이렇고 저렇다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자아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자아를 보호하고 남에게 드러내고 과시하며 힘을 발휘하고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또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괴로와 한다. 이 자아는 우리의 의식의 범위 안에서만 활동하고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이 자아보다 훨씬 더 큰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아보다 훨씬 크고 온전한 내가 있는데 이를 자기(Self)라고 부른다. 이 자기라는 나는 내가 달성해야할 가장 이상적이요 완전한 나의 모습인데 이 속에 자아까지를 수용하고 품어주는 진짜 나의 모습이다. 즉 이 자기를 이룩하는 일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요 이는 곧 참나무로 자란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 자기라는 이름의 또 다른 나는 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 세계 속에서 은밀히 활동한다. 허나, 자아의 검증에서 밀려난 욕구들이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 무의식 세계 속에 싸여 점점 힘을 모아 나의 자아에게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방향을 바꾸어라. 그렇지 않으면 불행에 빠진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결코 성장하거나 네 인생의 바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이 때 나의 모습 가운데 큰형님이신 자기의 권면과 충고를 꼬마 동생인 자아가 수용하면 비로서 내 인격의 치유와 성장과 완성이, 그래서 건강한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마치 값비싼 포도주와 그 것을 담고 있는 병목과도 같다. 중요한 것은 포도주이다. 그러나 이 포도주의 자기가 내 삶 속에 흘러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아라는 병목을 통과해야만 한다. 만약 병목이 막혀 있거나 포도주가 흘러 들어오기를 방해한다면 아무리 좋은 포도주라 할지라도 밖으로 나올 수도 맛을 볼 수도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를 이룩해 가기 위해서는 자아라는 병목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이처럼 자기는 더 큰 힘을 가졌지만 자아의 도움과 협조가 없이는 스스로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아의 도토리가 자기라는 참나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껍질이 깨어지고 벗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도토리는 결코 참나무가 될 수 없다.
이 질기고 단단한 도토리 껍질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쿵켈의 표현에 의하면 자기중심성이다. 이 껍질이 나의 큰형님이신 자기의 인도와 가르침을 거부하고 계속 좁고 어둡고 불만족스럽고 불편한 자아의 꼬마 동생 즉 도토리 속에 웅크리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의 뜻만 고집하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언제부터인가 성장이 중단되고 같은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난쟁이와 같은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 일어나는 현상이 온갖 정신적, 영적 질병이다. 성경 말씀은 이러한 삶을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울 사도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9, 24)라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이제 어떻게 그 두껍고 질긴 도토리 껍질을 깨트리고 벗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는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가?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가와 같은 차원의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치유와 성장이 자아가 활동하는 의식 세계에서 보다 자기가 활동하는 무의식 세계에서 더 활발하게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무의식과의 접촉과 대면을 통해 우리의 자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일깨우고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은혜를 받은 체험을 회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오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소위 말하는 은혜의 체험은 단지 지식적으로 이성으로 동의할 때만 오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리는 그 무엇이 나를 눈물 나게 만들고 감동시키고 은혜를 체험케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서 진정 내가 원하는 자기의 음성을 들을 때, 무의식을 강하게 도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깊은 무의식 속에 나도 모르게 진정한 자기 (하나님의 형상)와 만났을 때 내 속에 기쁨과 감격과 삶의 힘과 보람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무의식 속의 자기 곧 하나님의 형상을 만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내 뜻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고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
1) 기도와 예배를 통해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날 수 있다. 기도는 호흡이요 대화요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이 기도는 우리를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끄는 힘이 있다. 깊은 기도를 통해 내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라. 그 음성을 들으라. 그리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자기중심적 삶의 태도와 자세가 바뀔 것이다. 더 나아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열릴 것이다.
2) 고난을 통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두껍고 질긴 도토리 껍질, 즉 자기중심성은 결코 만만히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고난이 유익이다. 고난의 망치를 통해 그 두꺼운 죄악의 껍질이 서서히 벗겨진다. 우리가 고난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그 어떤 고난도 의미 없는 고난이란 없다. 고난이 다가올 때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분명한 사실은 이 고난을 통해 내가 지금 변화되고 성장하고 치유 받고 있음을 믿고 인내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두꺼운 껍질을 벗기기 위해 잠시 이 고난을 사용하고 계심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3) 꿈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 나갈 수 있다. 꿈은 우리의 무의식 가운데 자기의 가장 정직하고 강력한 언어이다. 자아의 검열에서 밀려난 내용들이 무의식에 저장되고 이들을 모아 자기가 대변하려는 언어가 의식의 빗장이 열려있는 꿈 속에서 나타나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은 계시적이며 치유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꿈을 잘 꾸고 이 꿈을 잘 해석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꿈을 주시하자. 그러기 위해 꿈 일지를 반드시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리 생생한 꿈도 몇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꿈을 아무런 힘도 내 삶에 발휘할 수 없다. 무의식에서 일어난 꿈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 올릴 때 비로서 이 꿈이 내 삶의 방향을 인도하는 배의 키와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자기의 꿈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완성하거나 치유 받을 수 없다.
4) 영적지도자를 찾으라.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기만의 맹점(blind point)을 가지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자신은 자기의 무의식 세계를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우리는 누군가 나를 영적으로 돕고 함께 성장을 향한 순례 길을 걸어가 줄 동반자가 필요하다. 그 한 사람을 찾아 나서라. “누군가 당신을 진정으로 도와줄 그 한 사람을 발견하면 주저하지 말고 전력을 다해 찾아가 도움을 구하라”는 아일랜드의 격언과도 같이 지금 그 사람을 찾으라. 그리하여 함께 기도하며 감춰진 문제를 발견해 도토리 껍질을 벗고 참나무로 성장하는 기쁨을 누리자.
도토리 껍질을 벗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직하게 자신의 내면을 인정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모습도 받아들여야 만 한다. 이는 아픔과 고통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답하지만 그 속에 안주하는 길을 택한다. 성장과 치유의 꿈을 포기해 버린다. 불행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탄식하실 일이다. 그러나 이는 전생애적 과제요 포기할 수도 소흘이 할 수도 없는 우리의 지상 최대의 목표이다.
오늘도 한 알의 도토리를 만지작 거리며 나를 생각해 본다. 오늘의 나를 뛰어 넘어 내가 이룩할 나의 멋있고 아름답고 건강한 참나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