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align=left><FONT color=#7820b9><EMBED style="BORDER-RIGHT: #ff0099 4px ridge; BORDER-TOP: #ff0099 4px ridge; BORDER-LEFT: #ff0099 4px ridge; WIDTH: 450px; BORDER-BOTTOM: #ff0099 4px ridge; HEIGHT: 371px" src=mms://222.96.47.97/syrcast/column/fes/fes20060728.wmv width=450 height=371 type=video/x-ms-asf autostart="true" invokeURLs="false" allowScriptAccess="never" allowNetworking="internal" enableHtmlAccess="false" AllowHtmlPopupwindow="false" showstatusbar="1" loop="-1" border="0" hspace="0" vspace="0"></FONT></P>
<P><SPAN style="FONT-SIZE: 10pt"><FONT color=#7820b9>요덕스토리 정성산 감독 간증 2006년 7월 28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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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FONT color=#4682b4>[北수용소 실상 담은 뮤지컬 요덕스토리, 정부지원 받아 월드투어 돌입 “야수의 삶을 늑대처럼 달렸다”]</FONT></STRONG> <BR><BR>뮤지컬 요덕스토리는 현존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인 함경남도 요덕군 15호관리소에서 벌어지는 잔악한 인권유린의 실상을 담은 작품이다. 그러나 사랑과 갈등, 용기 등 수용소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담고 있기에 정치적이면서도 동시에 높은 예술적 가치를 띠고 있다. <BR> <BR>때문에 방송매체에 비춰지던 북한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생각하며 선입견을 갖고 찾는 사람도 이 뮤지컬만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어 극장을 다시 찾곤 한다. <BR><BR>2010년 2월 16일 오후 8시. 1,540석의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국립극장 해오름관에서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막이 올랐다. 지난 9일부터 정부 지원 하에 진행되고 있는 월드투어 공연이었다. 140분의 러닝타임 동안 분위기가 고조되고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가 연출될 때 마다 자리를 가득 메운 방청석에서는 아낌없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BR><BR>뮤지컬 요덕스토리는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던 2006년 초연되었다. 당초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지만 당시 청와대 분위기가 북한정권에 우호적이었던 만큼 영화제작은 쉽지 않았다. <BR><BR>제작이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갖은 시련을 거쳐야만 했다. 정부지원은커녕 노골적으로 요덕스토리를 폄하하기까지 했다. 초연부터 흥행몰이를 하자 노무현 정권은 공식석상에서 “(북한의 실상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극화되어 있어 국민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BR><BR>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요덕스토리는 당연히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국민적 반향에도 불구하고 요덕스토리는 항상 자금난에 허덕였다. <BR><BR>투자를 약속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음 정권에서 보자”며 약속을 뒤집었다.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가 교회에 난입해 돈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2007년 국내 주요 언론들은 ‘요덕스토리 감독, 빚더미에 올라앉다’는 식의 자극적인 제목의 보도를 내보내며 “요덕스토리로 흥행했다가 요덕스토리로 망했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BR><BR>그러나 국민의 심판의 칼날이 10년 좌파정권에게 겨눠지고 마침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요덕스토리에 가해졌던 보이지 않는 ‘제재’도 차츰 해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11월, 이명박 정부는 요덕스토리에 대한 지원을 전격 결정했다. <BR><BR>언뜻 보기에 뮤지컬 요덕스토리는 정권교체라는 시대의 흐름에 무임승차해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높은 퀄리티를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사채업자들의 위협에 맞서고, 3년 동안 수백 차례 국회를 드나들며 정치인들을 설득했던 초인적인 정신력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정성산(42) 감독이다. <BR><BR>1995년 서울에 정착한 정 감독은 평양 출신이다.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고 러시아까지 유학할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출세가도를 달렸던 그를 한 순간에 ‘탈북자’로 만든 것 또한 바로 예술이었다. 그는 북한사회의 금기를 깨고 남한의 시청물을 접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각되었고, 결국 그는 고향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BR><BR>남한에 온 뒤 전공을 살려 평범한 영화인, 예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그가 수 년 간의 몸서리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뮤지컬 요덕스토리에 매달린 이유는 다름 아닌 집념과 의지였다. 16일 공연 폐막 이후 늦은 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본 방송과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한 그는 요덕스토리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나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BR><BR>국립극장 해오름관에서 가진 정성산 요덕스토리 감독과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BR><BR><BR><STRONG>-인터뷰 전문- <BR></STRONG><BR>취재진 : 오늘 공연 정말 감사히 잘 보았다. <BR><BR>정성산(이하 정) : 고맙다.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BR><BR>취재진 : 오래전부터 요덕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새삼스러울 수 있지만 어떤 계기로 요덕스토리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BR><BR>정 : 2003년 무렵 아버님이 회령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생긴 오기로 시작했다. 내가 가진 인생의 재산은 예술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그 쪽을 생각하게 됐다. 원래 요덕스토리는 2004~2005년 무렵에 영화 시나리오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당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집권하다 보니까, 좌파적 성향을 가진 풍토였으니까 (영화 제작에) 힘든 점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이든 만들어서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기에 2006년 뮤지컬로 요덕스토리를 시작하게 됐다. <BR> <BR><BR><IMG style="CURSOR: pointer" src="http://www.fnkradio.com/data/board/qqqnewsmain/file_in_body/1/c5a9b1e2baafc8af_dsc_0107.JPG" border=0 on-click="imgSize_OPEN(this.src)"><BR><정성산 요덕스토리 감독. ⓒ자유북한방송> <BR><BR><BR>취재진 : 북한에서도 예술을 전공했는가? <BR><BR>정 :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졸업했다. 러시아에 가서 2년 정도 유학했으며, 한국에 와서는 동국대학을 졸업했다. 미국의 UCLA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BR><BR>취재진 : 유복한 가정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는가? <BR><BR>정 : 탈북한 해가 김일성이 사망한 94년이었다. 16년 전이니까 참 오래됐다. 남한 방송을 듣다가 잡힌 것이 탈북의 계기이다. 2군단 위탁생으로 대학에 입학해 개성에 있는 일선부대로 차출됐었는데 대학 졸업반이었던 해에 한국 방송을 접했다가 잡혀서 끌려갔다. 2개월 정도 갇혀 있다가 다시 개성에 있는 군사재판소로 끌려가서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호송하던 차량이 전복되어 그 틈에 탈출했다. 그 때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BR><BR>취재진 : 탈북과정은 어떠했는가? <BR><BR>정 : 평양의 집으로 갔더니 가족 모두 추방된 상태였다. 양강도 혜산으로 추방되었다고 했다. 당시 나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북한군 총정치국이나 그런 곳에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박OO 등 지인들이 많아서 (도움을 받아) 군복을 입고 탈출했다. <BR><BR>취재진 : 그러한 과거가 오늘날 뮤지컬 요덕스토리의 근간이 된 것 같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힘든 과정이 많았다고 들었다. 사채 관련 보도까지도 나온 적이 있는데. <BR><BR>정 : 사채는 지금도 쓰고 있다(웃음). 탈북자들은 누가 도와줘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자생(自生)한 사람들이다. 나만 해도 누가 키워준 것이 아니므로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쓴물, 단물, 소위 말하는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생각한다. 죽으려고도 몇 번 시도했었다. 사채업자와 너무 싸워서 친구가 되기도 했다. <BR><BR>그런 풍찬노숙(風餐露宿)과 같은 세월이 지나면서 느낀 것은 ‘나 같은 사람이 있어야 되겠다’였다. 나라도 이야기를 안하면 누가 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자유북한방송의 사명감과 나의 사명감이 비슷하지 않나 생각한다. <BR><BR>이번 공연의 주제가가 ‘민들레노래’인데 그것이 내 컨셉이다. 요덕스토리 대사 중에 “야수 같은 삶을 늑대처럼 달려왔다”는 말을 넣은 것도 그런 심정에서 넣게 된 것 같다. 지금 현재 나의 상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힘든 것을 넘어서는 지혜를 터득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BR><BR>탈북자로서 지금 나의 경쟁상대는 한국이 아니다. 이번 월드투어는 단순히 요덕스토리를 알리는 의미도 있지만 전 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다. <BR><BR>취재진 : 이제 정부지원을 받게 됐다. 월드투어를 진행 중인데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월드투어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정을 거치게 되는가? <BR><BR>정 : 아직 정부예산은 안 나왔다. 곧 나올 예정이다. 근 3년 동안 국회를 일주일에 3~4번씩 방문했다. 의원실을 찾아다니면서 왜 요덕스토리이고 왜 문화가 필요한가를 설득했다. 솔직히 미국에서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에서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처음부터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아 요덕스토리를 하게 되면 우리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꼭 지원을 받겠다는 그런 각오로 수차례 해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BR><BR>정말 요즘은 생일을 11월 30일로 바꿔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작년 11월 30일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되고 나서 정말 남자답게 울어봤다. 한국 헌정 역사상 탈북자가 (정부 지원을) 받은 역사도 없거니와 한 개 뮤지컬이 이렇게 많이 받은 사례도 없다. 기껏 많이 받은 것이 명성황후의 6억이다(기자 주-요덕스토리는 정부로부터 10억 원을 지원받게 된다). <BR><BR>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뿌듯하지 않다. 오는 5월 뉴욕의 유엔본부 본회의장 공연을 추진 중이다. 그 때 유엔 주재 북한대사 등을 초청할 것이다. 아마도 북한 정권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문화를 무기로 전쟁을 공식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BR><BR>링컨센터에서의 공연도 5회 정도 기획 중이다. 그 때는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나 뉴욕시청 관계자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캐스팅디렉터라고나 할까,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프로듀서들이 많이 올 것 같다. <BR><BR>이 과정이 끝나면 워싱턴의 케네디센터로 가서 오바마 대통령을 초청한 가운데 공연할 예정이다. 이후 LA로 갔다가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귀국하기까지가 1차 계획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올해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므로 6월 달 쯤에 한국에서 다시 앵콜 공연을 가질 것 같다. 8월부터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투어를 시작할 예정이다. <BR><BR>취재진 : 언제까지 월드투어가 진행될 것 같은가? <BR><BR>정 : 예정되기로는 올 해 연말까지이다. 하지만 내년 2~3월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BR><BR>취재진 : 오늘 공연에서 배우들의 연기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확인했다. <BR><BR>정 : 모두 국내에서 유명한 뮤지컬 배우들이다. 나는 오디션을 하면 1~3차에서 300명 정도를 줄인다. 그 경쟁 속에서 캐스팅 된 사람들이다. <BR><BR>취재진 :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은 대사가 ‘하나님 아버지, 남조선에만 가지 마시고 이곳 요덕에도 오소서’이다. <BR><BR>정 : 우선 나 자신이 기독교인이다. 속상할 따름이다. 정말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북한에 비해) 남한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속상하다. 왜 그럴까? 그런데 요즘 요덕스토리를 연출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바로 (남북의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이런 힘든 일을 시키시는구나하는 생각이다. 나는 기독교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적으로 통일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BR><BR>취재진 : 월드투어에 나선 요덕스토리의 내용이 과거와 다른가? <BR><BR>정 : 많이 달라졌다. 거의 3분의 2정도가 바뀌었다. 극 중 대사가 많이 줄어든 지금 버전은 월드버전이다. 대사가 많이 줄어든 이유는 국내에서는 북한 사투리가 주는 재미가 있지만 외국 사람들에게는 그 사투리로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사로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과거 요덕스토리를 본 사람들에게 지금의 월드버전은 조금 싱거울 수도 있다. <BR><BR>앞으로 더 많이 발전해서 차츰 다듬어질 것 같다. 앞으로 브로드웨이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얼마나 더 많이 (내용이) 바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2월 공연이 끝나고 3월 첫째 주에 미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유명한 뮤지컬 작곡가, 연출가들을 많이 만날 예정이다. <BR><BR>나는 그거다. 이제는 북한, 그리고 북한인권도 럭셔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한 컨텐츠는 왜 자꾸 불쌍해야하는가? 나는 그것이 화가 나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것은 왜 자꾸 굶주리고 배고파야 하는가? 오는 12월을 목표로 기획 중인 새 뮤지컬은 ‘꽃제비(기자 주-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지칭하는 비속어)’를 소재로 다룬다. 산타할아버지를 찾아가는 북한 어린이들의 이야기인데, 상당히 판타스틱한 컨셉이다. <BR><BR>나는 주식시장의 논리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이제는 정말 북한이라는 테마주가 상한가를 칠 때가 됐다. 그러면 과연 누가 이기겠는가? 컨텐츠를 갖고 경쟁력을 가진 사람만이 이기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정말 고민 많이 하고 산다(웃음). 잠도 많이 못 자고. <BR><BR>취재진 : 너무 앞질러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통일이 되고 정치범수용소가 해체되면 그 때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은가? <BR><BR>정 : 아직 생각은 못해봤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영화 요덕스토리이다. 쉰들러리스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나는 우리 탈북자들이 이제는 정말 대한민국의 리더, 성공한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의 주력군이 되고 파워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북한에 대한 가장 큰 메시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야수 같은 삶을 늑대처럼 달려가나 보다. <BR><BR>요덕스토리는 수용소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매카니즘은 모두 한국적인 정서이다. 북한스럽게 하면 안 본다. 영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JSA에 참여하면서 느낀 점이다.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러나 국내에서 그동안 생각한 북한 사람의 이미지는 굉장히 강하고 거칠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북한 남성들도 알고 보면 싹싹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통일 이후에는) 그런 이상을 표현하고 싶다. 북한 남자들과 참 결혼하고 싶네? 그런 것(웃음). <BR><BR>취재진 : 늦은 밤까지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다. <BR><BR>정 : 고맙다. 또 보러 오길 바란다. <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