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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의 진정성

by 스위마일리 posted Feb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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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의 진정성

 

첫째,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나타났던 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있을 동안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나 가이사랴, 에베소에서는 방언이 나타나면서 하나님을 높이는

모습이 보였지만 고린도에서는 전혀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둘째, 바울은 그들이 무슨 방언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접 가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에 이상한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방언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수가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알게 되었고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대략 이야기를 해서 알게 되었으며 스테바나 브도나도

그리고 아가이고 집사가 와서 하는 말을 듣고 대략 알게 되었다.

 

셋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찾아 볼 수가 없고 반면에 시기와 다툼과 교만과 자랑과 성냄과 떠드는 것과

요란한 것과 무질서와 아볼로를 괴롭혀서 사임하게 하는 것과

심지어 바울사도까지도 배척하면서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떠드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넷째, 오순절에 나타난 방언과 가이사랴에 나타난 방언과 에베소에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었고 통역도 되지 않는 방언이었다면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고린도 방언사건 이전의 방언에 대해서는 통역이 필요했다는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는 들어야 할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외국 방언을 직접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어지럽히던 방언 문제가 디모데가 가서 수습한 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교회는 잠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디모데가 다녀 온 후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었지만 문제의 그 이상한 방언으로 교회를 어렵게 했던

사람들은 잠잠하게 되었고 고린도 후서 어디에도 다시는 방언문제는 언급이 없다.

 

여섯째,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 편의 서신들 중에 어디에서도 방언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고린도에서만 그 방언이 잠깐동안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 방언들의 진정성에

석연치 않는 점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화평의 하나님이신데 과연 성령님께서 은사로 주신 방언이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상한 방언을 주셨을 가능성은 의심의 여지가 있다.

 

(고전 14: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이상한 방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01. 바울이 여러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우월한 은사로 말하지 않고 맨 끝에 두었다.

02. 바울이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꽹과리와 같은 것이라고 혹평을 하였다.

03. 바울은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떠들면서 방언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04.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교회에 아무런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음을 알았다.

05.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님의 은사라고 할지라도 예언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고 정확하게 지적을 했다.

06. 폐일언하고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명령을 했다.

07.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라고 했다.

08. 통역이 있다 해도 다불과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정도가 교회 지도자의 지도를 받아서 순서를 따라서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을 분명히 했다.

09.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10. 율법대로 여자는 오직 복종할 것을 엄히 명하였다.

11. 여자들이 교회에서 떠드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단호하게 질책을 했다.

12. 바울은 어떤 착각하는 여자들에게 스스로 신령한 줄로 알거나 스스로 무슨 선지자로 여기는 여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님의 명령인줄로 알라! 하고 엄하게 말했다.

 

 

디모데가 비록 젊고 미숙 하지만 이렇게 단호한 바울의 명령을 읽어 주었을 때

그렇게 난동을 부리면서 이상한 방언을 하던 여자들은 시무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게 쉽게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고린도 후서를 유의하여 살펴보면 디모데가 고린도에서 돌아 온 후 고린도에서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분별없이 방언을 추구하면서 무리한 이론으로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방언 기도는 성령의 기도가 아니다

 

고전14:14절에 바울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이는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방언기도는 그것이 설사 정상적인 것이라 해도 사람의 영이 하는 기도일 뿐 결코 성령의 기도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은사주의에 치우쳐서 진리를 잘 못 가르치는 사람들은 방언기도를 성령의 기도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이론의 근거를 유다서 20절이라고 들이대고 있다. 그러나 유다서 20절의 의미는 그러한 뜻이 아니다. 유다서 20절을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6:18절에 나온 바와 같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엉터리 해석이다.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유 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지금까지 은사주의자들이 떠들어 대는 대부분의 방언들이 여러가지 면에서 살펴 볼 때 오순절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고 대부분 고린도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던 이상한 방언들과 거의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유창하게 방언으로 또박 또박 말하고 성실하게 통역을 하는 경우라도 나중에 보면 99%가 가짜 방언이요

가짜 통역이었다.

 

심지어 방언으로 예언한 것을 통역으로 예언하면서 녹음까지 해서

전국 교회에 다 돌리기까지 했던 그 수 많은 방언들과 통역들이

결과적으로 보면 100% 다 가짜였다.[ 1992년의 열풍이란 책을 읽어 보라]

 

작금에 미국이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분별없이 추구하는 신비주의나 은사주의는 매우 위험하고 문제가 될 수 있다.

마귀가 사람들을 속이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방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아예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러한 현상이 만약 성령님의 은사라면 자신들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범하지나 않을까 하여 지레 겁을 먹고는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그러한 것을 사모하고 또 그렇게 미신적으로 약간 신비한 점이 있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파악한 목사들은 기를 쓰고 그러한 방언을 받아 보겠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때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이 가짜였다면 오늘날 모든 종교에 다 나타나고 있는 방언이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만연되고 있는 방언은 오순절에 나타났던 방언과 다르고 가이사랴에 나타났던 방언이나 에베소에 나타난 방언과 다르다.

 

따라서 작금에 온 세계 모든 종교 집회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방언,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알아 들을 수 없으며 통역이 되지 않거나 통역까지 엉터리 통역을 하게 하는 영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들의 기만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모든 종교를 속일 수 있는 악령들이라면 성경도 모르는 목사들이나 기독교인들이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사람들을 속이려 하는 악령이라면 다른 종교인들보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더 속이려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이 시대와 말세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20세기의 방언

 

20세기 이전의 방언들은 모두 이단 집단이거나 광신도 집단들에서 방언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방언은 20세기 초에 오순절파 계통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1960년대 이후 여러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이 활동하면서 방언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초창기에 이들은 기성 교단으로부터 이단시되었다. 그러한 방언이 시간이 흐르면서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오늘날에는 국내 대부분의 교파에서 행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방언 집회까지 열리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문제는 작금에 문제가 되고 있는 방언들 대부분이 오순절의 방언과는 현저하게 다른 방언이고 대개는 알 수 없는 방언 즉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방언과 같은 종류의 방언이라는 점이다. 만약 사도들이 없는 데서 나타났던 고린도 교회의 방언이 가짜 방언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오늘 날 교회에 만연되어 가고 있는 방언들은 가짜라고 볼 수가 있다.

 

 

도날드 버딕은 현대 방언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 한다.

 

① 항상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경우가 대분이다.

②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의 언어적 배경이 비슷하다,

③ 한두 개의 모음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④ 문법적인 구조도 없고 언어적인 요소가 부족하다,

⑤ 방언의 길이에 비해 통역이 현저히 너무 길다,

⑥ 동일한 방언 구절의 통역이라도 번번히 일치하지 않는다,

⑦ 영어 통역시 주로 17세기 초의 흠정역(KJV) 문체가 사용된다.

 

 

방언을 하는 사람은 기도방언을 했는데 통역은 설교를 한다.

방언을 한 사람은 방언으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통역은 예언이 나온다.

짧은 방언을 길게 통역하고 길게 말한 방언문장을 짧게 통역한다.

같은 방언을 다른 통역자에게 들고 가서 통역을 하면 다르게 통역한다.

같은 방언을 같은 통역자에게 들고 가면 그때마다 다른 통역을 한다.

 

 

미쉬간 대학의 언어학자 케넷 파이크와 미국 성서공회의 언어학자 유진 니다 등은 오늘날의 방언이 언어학이 다룬 어떤 실제적 언어와도 비슷하지 않다고 지적하였다. 분별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이 어떤 것이었으며 그 의미와 진정성을 충분히 인식한 후에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에 대한 오해

 

은사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은 오늘날 알 수 없는 방언을 두고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언들의 성취라고 오해하고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①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②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새 방언을 말하며

③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뱀을 집으며

④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⑤ 모든 믿는 사람들마다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치유가 되는가?

 

 

이러한 말씀이 모든 시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새 방언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일어나기도 할 것을 예언하신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들은 오순절과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고 또 에베소에서 확실하게 이루어졌던 말씀이었다.

 

 

사람이 뱀을 집어서 물리게 되었는데 해를 받지 않았던 사건도 특수한 경우에 특별한 사람에게 일어나기도 했던 일이다.(행28:3)

 

사람의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요한 행전을 보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에서 독약을 마셨는데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고 독약을 마시게 하여 죽었던 사람까지 살려내었던 사건도 실제도 일어났었다.

 

 

병든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서 낫게 한 이들도 사도들의 시대에 여러 차례 이루어진 표적들이었다.

이러한 표적들이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어떤 보장도 없었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표적들은 대개 사도들의 시대에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과 그들이 기록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증빙하는 차원에서 따르게 하신 표적이셨다

 

                                                     - 에스라 칼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