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교

꿈 속의 중국 방문기

by 장진명 posted Dec 1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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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center">꿈 속의 중국 방문기</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right"><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right">-안수 집사 장진명</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첫째 날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2006년 8월 10일 오후 8시 어머니(김말이 명예권사), 집사람(이순화 권사)과 함께 중국의 친지 방문을 위해 집을 나섰다. 72년 전 일제 치하의 생활이 고통스러워 가족을 데리고 먼 만주로 떠나신 이모부 내외. 그 언니를 늘 그리워하며 온갖 방법으로 한결같이 찾기를 기도하신 어머니. 그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며 컸던 나. 그 고통의 세월이 얼마였던가.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 같은 사랑으로 그 형제들을 찾았으니.</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오후 9시 경 칠곡 휴게소에서 삼량진에 있는 형수와 조카 내외 또 두 아들 해서 각각 승용차로 나눠 타고 인천 공항으로 가기 시작했다.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한 시경 대구의 날씨가 더워 잠을 설칠 것 같아 일찍 시원한 공항 대합실에 도착해 쉬기 위해 왔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둘째 날</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새벽 5시 30분 경 남동생 조카 형제가 도착. 전체 10명, 대식구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두 시간 정도 지나 중국 장춘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쯤(시차 한 시간 늦음)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대합실을 나서니 꽃다발 세례와 올봄에 한국을 다녀간 형제들 또 조카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형제들과 조카들의 도움으로 다섯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시원한 고속도로를 한 시간 정도 달려, 길림 시내 삼성급 호텔 객실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호텔 식당에 집안 모든 식구들이 모였다. 형님과 누님, 여동생들은 어머니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꼭 닮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린다. 72년 전에 친척도 없는 먼 만주 중국 땅에 와 일찍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9년 전에 돌아가신 이모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여기서 태어난 이 형제들을 눈물 속에 키웠을까. 눈물 어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중국식 음식이 회전식 식탁에 가득 놓여져 우리 일행은 처음 보는 수많은 음식 맛을 음미하며 정말 맛있게 많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25인승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알았지만 이 버스는 길림성 관광국에서 귀빈을 모시는 차량인데 운전은 기사가 아닌 관광국 주임이 직접 한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길림시내에서 30여 분 정도 가니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여 호수를 이루고 있는 송화호에 도착했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우리 식구들은 큼직한 배에 승선하라고 해서 배에 오르니 보통 유람선 하고는 많이 달랐다. 호수 주변에는 관광객을 유람시키는 유람선이 많이 있었지만 주변 여행객 모두가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1층 선실에 들어가니 테이블 위에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고 총지배인과 선장이 우리 식구들에게 다가와 인사를 겸하여 이곳 호수의 내력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배의 내력을 들어보니 이전에 장쩌민 주석이 이 배를 타고 유람하며 휴식을 취했던 배인데, 지금 와서는 국빈이나 내빈이 방문하면 이용한다고 한다. 송화호 호수를 한 바퀴(둘레가 300리) 돌아보려면 일곱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니 정말 크다. 중국에는 23개의 성이 있으며 5개의 자치구 4개의 직할시, 2개의 특별 행정구가 있으며 56개의 각기 다른 민족들이 모여 이 거대한 중국을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길림성의 인구는 300만 정도이며 면적이 대한민국보다 더 넓다고 하니 정말 대국인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nbsp;&nbsp;&nbsp;&nbsp;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3시간 정도 유람을 한 후 선착장에 도착하니 저녁 식사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영빈관 내로 들어가서 좀 쉬었다. 이윽고 저녁 식사 시간 회전 테이블에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얼음으로 조각한 독수리 장식과 송화호에만 자라는 물고기회 및 생전에 구경도 못해본 음식들이 끝이 없이 나온다. 중국에는 지방자치제를 오래 전부터 시행한 터라 길림에서 제일 가격이 비싸다는 복주(우리 고량주인듯)가 나오더니 영빈관 책임자분이 다시 한번 인사를 한 후 이윽고 건배가 이어진다. 나는 직장에서 회식에 참석해도 소주 두 잔이나 맥주 두 잔이 치사량이다. 그런데 여기 풍습은 최고의 손님 접대가 음식을 마음껏 먹고도 음식이 남아야 하며 술잔에 술이 조금만 비워져도 연신 첨잔을 하여 건배를 권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 풍습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술을 입에 대었는데 그 독한 술 몇 잔을 마셔도 입안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취하기만 할 뿐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불편하진 않았다. 형님은 길림성 어업구(길림성 내 송화호 및 강과 호수 관리)에 있는 처장으로 정, 부가 있는데 부로서 근무하고 있고 형수는 재정처(길림성 내에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부서)에 정으로 근무한단다. 형수가 더 높은 편이다. 형수는 길림성 내에 조선족으로는 두 명 정도가 최고의 지위에 있는 그 중 한 명이라고 한다. 형님과 형수가 이런 자리에까지 오르기에는 얼마나 많은 고생과 노력이 있었을까. 결국 모든 형제들을 길림 시내로 불러 들여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마련해 준 것이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셋째 날</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아침 일찍 일어나 아내와 함께 호텔 준변에 있는 재래 시장으로 구경을 나섰다. 내가 어릴 때 보던 쇠고기나 돼지고기, 개고기 등을 리어카나 손수레 위에 놓고 판매하는 모습, 송화호에서 잡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을 파는 모습, 한국 김치와 밑반찬도 만들어와 판매하고 있었다. 참 여러 기억이 난다. 호텔에 돌아와 아침 식사를 중국식으로 하고 백두산으로 가기 위해 8시경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에 지나가는 풍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들판에 옥수수와 논의 벼 포기만 보인다. 얼마나 갔을까. 휴게실에 도착해 화장실 표시가 된 곳으로 따라가니 재래식이다. 긴 통로에 문이 없으며 앞쪽 사람이 용변을 보면 마주 보고 있어야 하고 냄새도 나며 힘이 들었다. 볼일을 마치고 건물 앞으로 오니 아뿔사 여기에 제대로 된 화장실이 있다. 6년 전에 중국 북경과 만리장성 여행을 갔을 때 관광지를 벗어난 동네의 재래식 변소가 다 이러했다. 12시쯤 돈화시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 연길, 화룡, 안도현을 지났는데 대부분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돈화시 재정국장, 마중 나온 일행과 점심 식사를 했다.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보지만 통하지가 않는다. 인사 치례로 거절할 수가 없어 조금씩 마시며 나머지는 모르게 버리다 그만 들켜버려 무안하기도 했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점심을 배불리 먹고 다시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오후 4시 40분쯤 드디어 이도백하에 도착, 객실에 여장을 풀고 간단하게 샤워를 한 후 저녁 6시까지는 시간이 있어 숙소 옆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교회 십자가가 보여 이 권사와 교회에 가 보려고 숙소를 나섰다. 내일 주일이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것 같아 기도와 감사 헌금을 하려는 마음에 15분 정도 걸어 교회에 갔는데 좌측문 기둥에 ‘안도현 이도백화 기독교회’라고 한글로 쓰여 있고 우측 기둥에는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문에 다가가니 자물쇠로 철문을 잠가 놓아 들어갈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문설주만 잡고 묵상 기도로 주일을 대신하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주변 시장을 구경하니 이곳은 길림 시내보다 더 초라하여 사람들 행색이 남루하다. 시장에 판매하는 물건들이란 조그만 바구니에 산에서 채취한 각종 나물과 버섯들, 장뇌삼, 리어카에 고무신과 우리나리에서는 공짜로 준다 해도 신지 않을 것 같은 운동화. 하지만 조금 떨어진 한 상점의 쇼윈도에 걸린 옷과 남녀 구두들은 화려하고 너무나 대조적이다.</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BR></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넷째 날</SPAN> </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새벽 2시가 조금 지나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 조금 있으니 형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문을 두드린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토하며 설사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객실 전부를 돌아보니 조카들도 증상이 똑같다. 형님이 주무시는 객실로 가서 말씀을 드리니 음식을 갈아먹으면 이렇다고 하며 준비해온 약을 5명에게 먹였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지금까지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배탈이 난 것이다. 약을 먹고 잠을 좀 자고 나서 눈을 뜨니 밖에 비가 오고 있다. 얼마나 백두산 보기를 기대했는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 아무래도 천지 구경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주차장에 도착할 즈음 비가 그쳤다. 아직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주차장에 버스와 각종 차들이 가득 차 있다. 옆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니 전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안내를 맡은 직원 이야기가 여기를 찾는 관광객 70% 정도가 한국인이며 요즘 들어 중국인들도 많이 오고 있다고 한다. 2008년까지는 이곳 백두산까지 도로와 공항을 건설한다고 하니 얼마나 오염이 될지 걱정이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조금 걸으니 입구에 장백산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백두산이 장백산이라니 눈에 거슬린다. 이곳부터는 일반 차량은 운행할 수 없다고 한다. 얼마를 더 달려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장백 폭포를 지나 백두산 천지까지 세 시간 정도 걸어가는 코스와 걷기 힘들면 지프차를 타고 천지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나와 식구들은 배탈로 인하여 걸어서 정상 가는 것을 포기하고 장백 폭포가 보이는 곳까지만 다녀오기로 했다. 입구에 뜨거운 용천수가 흘러나온다. 그 물로 계란을 삶아 팔고 있는데 우리도 몇 개 사먹었다. 길목 보자기에 장뇌삼을 가져와 판매를 하는데 한 뿌리에 우리 돈으로 2천 원이라고 하더니 가려고 하니 다시 천 원에 사라고 권한다, 얼마를 걸어 개울에 손을 담그니 여름철인데도 손이 시리다. 장백폭포를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다시 입구로 내려왔다, 배탈로 아침을 못 먹은 터라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드디어 지프차 여섯 대가 마당에 들어와 우리를 태우고 정상으로 출발했다. 도로에 속도 표지판에는 시속 20~30km로 표시되어 있었으나 60이상으로 달린다. 옆에 낭떠러지와 굽은 도로인데도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정상이 가까워지며 너무들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나무는 없고 이름모를 풀과 꽃들만 보인다. 드디어 정상 도착! 그러나 짙은 안개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명산 백두산 천지를 구경하기 위해 몇 년 전부터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천지를 구경하지 못하고 천지라는 표지석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식구들은 꿩 대신 닭이라고 소천지 호수를 구경한 뒤 조금 더 내려와 지하 식물원을 둘러보았다. 나무 사이로 1.5km의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곧고 큰 나무들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다.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13px;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구경을 전부 마치고 다시 이도백하로 와서 한국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숯불에 고기를 굽고 김치와 밥과 된장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여름철이라 직장이 바쁜 계절인 고로&nbsp; 4박 5일의 짧은 여행을 하나님 은혜 속에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대부분 중국에서 친척들이 돈벌기 위해 한국으로 초청이나 도움을 청한다고 하는데 그나마 우리 식구들은 도움을 주기 보다는 귀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사회주의 국가의 권력의 힘과 위력을 느껴보며 우리나라는 정말 깨끗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nbsp; </SPAN></P> <P style="FONT-SIZE: 13px;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21px;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P>